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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초청세미나

Seminars by Invited Experts

제2차 세계대전과 전시외교: 미일 교섭 과정을 중심으로정보
제목 제2차 세계대전과 전시외교: 미일 교섭 과정을 중심으로
발표자 안재익(安宰熤, 도쿄대학 문학박사)
일시 2021년 5월 11일 12:30~14:00
장소 Zoom Webinar
회차 253회
토론
2021년 5월 11일, 제253회 일본전문가 초청세미나가 웨비나로 개최되었다. 40여 명의 참가자가 참석한 가운데 안재익 도쿄대학 문학박사가 ‘제2차 세계 대전과 전시 외교: 미일 교섭 과정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발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41년 4월부터 12월의 진주만 공습 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미일 교섭을 다룬 기존 연구는 대개 교섭의 실패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본 발표는 교섭 과정에서 다루어진 쟁점, 특히 중일전쟁 문제의 해결방안에 주목하여 미일 양국의 관점 차이, 즉 그들이 지향했던 전후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를 살펴볼 것이다.
1940년 9월 27일에 조인된 삼국동맹 조약에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독일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일본의 대동아 지배를 보장받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1940년 11월 30일에 체결된 일화기본조약에서는 중일전쟁으로 점령한 지역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새로운 중국의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일본 정부의 목표가 반영되었다. 이에 미국은 삼국동맹으로 인한 독일·일본과의 양면 전쟁의 우려 속에서 태평양 지역에 대해서는 방어적 자세를 취하면서 영국과의 협력관계 강화를 통해 대서양 쪽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전략으로 대비했다.
미일 관계가 악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1941년 4월 17일 미일 양해안이 마련되어 일본 정부 측에 공식 전달되었다. 양해안에 따르면 삼국동맹 조약 해석은 일본이 우호적 해석으로 양보하고, 미국은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획득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여 양보한다는 ‘이익 교환’이 이뤄졌다. 그러나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마쓰오카 외무대신의 강경한 미일 국교 조정안이 5월에, 이익 교환 방식에 반대한 미국 극동국 전문가들의 미일 국교 조정안이 6월에 각각 등장했고, 제시안 간의 큰 차이로 인해 미일 관계는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독소전쟁의 발발로 인해 소련의 위협이 감소하고 대(對)영미전쟁 시 남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 획득을 위해 일본은 1941년 7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였다. 일본 측 예상과 달리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미국은 일본의 자산동결과 석유를 포함한 물자의 실질적 금수 조치를 시행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미일 정상회담이 재차 추진되었으나 이익 교환 방식으로 복귀한 일본 정부의 9월안은 다시 미 국무부 극동국 전문가와 국무장관의 반대에 부딪혔고 정상회담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최종적으로 갑안(甲案)과 을안(乙案)을 제시하고,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도 무력 충돌을 피하고자 잠정적인 협정 방안을 구상했으나, 국무부 극동국 전문가들에 의해 강경한 원칙이 고수되었고, 영국과 중국도 반대 의견을 표하며 잠정협정안은 폐기되었다. 이후 일반협정안이 제시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일본은 개전을 결의했다.
이상의 미일 교섭 과정을 살펴보면 1941년 미일양해안 성립으로 시작된 미일 정부 간의 대화에서 표면상의 핵심 논점은 중일문제의 해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일본군의 지속적인 중국 주둔과 괴뢰 정부 인사 활용을 통해 전쟁 종식 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삼국 동맹 조약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반면 미국은 종전 후 태평양 지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국가가 평등하게 참여한 새로운 태평양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미국이 서태평양 지역에 지니는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즉 양국은 전쟁 종료 후 새로 구축될 동아시아 지역 질서에 대해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중일전쟁 문제의 해결방안이었던 것이다. 1941년 이후 미일 양국의 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첨예한 대립은 미일 양국이 지닌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질서관의 대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발표가 끝난 후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남방 진출이 북방 진출에 대한 대안의 성격이었는지 혹은 적극적으로 남방 진출이 구상된 것인지. 석유 금수조치와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침공의 선후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정리되는가? 미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일본이 취한 대등한 태도의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일본의 공세적 전환에 있어서 미국의 핵전력이 고려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후 세미나는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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