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2021년 3월 30일, 제250회 일본전문가 초청세미나가 웨비나로 개최되었다. 20여 명의 참가자가 참석한 가운데 이영진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생명정치적 통치성에서 법의 의미: 미나마타(水俣) 소송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으며 발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발표자는 일본의 대표적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의 역사를 발병부터 정식 공해병 인정, 그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소송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질병의 ‘사회적 삶’을 규명하고 생명정치적 통치성에 있어 법이란 무엇인지라는 물음을 제기해보고자 하였다.
1956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로 불리던 미나마타병은, 1968년부터 정부의 공해병 공식 발표 이후 현재의 명칭인 미나마타병으로 불리게 되었다. 환자에 대한 보상과 배상을 둘러싼 논란을 고려하면 미나마타병의 역사는 전후 일본의 고도 자본주의화의 병리 구조를 보여주는 사회의 축소도라 할 수 있다. 발표자는 미나마타병의 역사를 미나마타병의 공식인정까지를 1기, 발표 이후 보상을 둘러싼 소송과 승소에 이르는 기간을 2기, 미인정환자를 둘러싼 소송과 정치적 해결에 이르는 기간을 3기로 구분하여 이를 일종의 사회적 드라마로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미나마타병의 연대기를 두텁게 쓰는 작업을 통해 질병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조명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재발견되는 많은 쟁점들을 연구과제로 삼을 수 있었다.
괴질에서 질병으로 나아간 1기에서는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원인물질의 규명에 집중하느라 초동 대처에 실패한 문제, 기존의 의학적 정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신생아 및 아이들을 방치한 태아 미나마타병 문제, 공식적인 보상 및 배상이 아닌 형식으로 이루어진 1959년의 위로금 계약 체결 문제가 그것이다. 2, 3기에 이뤄진 소송은 ‘미나마타병 보상처리위원회’ 설립에 따라 환자들에게 분쟁 처리를 후생성에 의탁하라는 확약서 수용을 둘러싸고 나뉜 소수 소송파에 의해 시작되었다. 1차 소송은 1969년부터 시작된 중증 환자에 대한 보상을 둘러싼 것으로 미나마타병 연구회의 연구 결과를 중요한 근거로 삼아 1972년 원고 측이 승소하였다. 이 승소에는 법리적인 근거뿐만 아니라, 진보적이었던 당시 여론의 압박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시 원고가 승소한 2차 소송은 1973년에 시작한 것으로, 구제 희망 피해자 수에 비해 까다로운 인정기준으로 인해 극히 소수만 인정된 것에 대한 소송이었다. 1980년부터 제기된 3차 소송은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서 이 역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원고가 승소하고 정부의 해결책 제시로 해결되었으나, 이는 여론의 압박과 법원의 화해 권고에 의한 것이며 정부 측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발표자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 한국에서도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과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같은 사건들이 동일한 구조로 반복되는 점을 인정 제도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생명정치적 통치성에서 소송과 법의 의미는 무엇인지, 미나마타 소송이 원고 측의 전면 승소를 이끌어내고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를 만든 획기적인 것이었음에도 인정 신청 환자의 10%만 인정되고 애매한 방식으로 보상되었다는 한계는 이 병의 특수한 상황에 기인하는 것인지 혹은 소송의 본질적 속성에 기인하는 것인지, 소송이 약자의 무기가 맞는지 등을 앞으로의 연구 문제로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2차 소송이 제기되던 상황에서 본사 점거 등의 직접 행동을 한 미인정환자 등의 실천이 갖는 의미를 다음 과제로 제시하며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발표가 끝난 후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미나마타병의 케이스가 공해병으로서 갖는 보편성과 특수성은 무엇인지, 코로나19 이후 기존의 생명정치적 통치가 어떤 식으로 기능해야 할지, 생명정치적 통치성의 관점을 통해 미나마타병 소송에서 새로운 지점의 도출이 가능한지 등의 질의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진 후 세미나가 마무리되었다.